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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22일], 1813년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태어나다.: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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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22일], 1813년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태어나다.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5/22 [04:48]

<오늘의 역사> [5월 22일], 1813년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태어나다.

김종현 | 입력 : 2010/05/22 [04:48]
▲리하르트 바그너 (사진제공=위키피디어ⓒ)

히틀러가 숭배한 작곡가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장래 독일 음악을 대표하는 대작곡가 리하르트 빌헬름 바그너가 태어났다. 4부작 악극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와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Bayreuther Festspiele)를 낳았으며, 악극과 유도동기(Leitmotive)를 창시하고,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와 관계 뿐만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가 열렬한 바그너리안(Wagnerian)이었다는 것으로도 유명한 작곡가다.

히틀러는 바그너를 빼면 "모범이 될만한 것은 없었다"고 했으며, 바그너와 "내적 동류의식을 지녔다"고 애기했다고 한다. 요하임 페스트는 바그너가 히틀러에게 위대한 생의 모범이며 스승이었다고 했다. 히틀러는 《니벨룽겐의 반지》를 가장 좋아했으며, 이 악극의 마지막 4부는 의미심장하게도 『신들의 황혼』이다. 바그너 자신도 반유대주의자였으며,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제국 이미지를 많이 차용한 것도 사실이다. 이때문에 바그너 작품에게서 자연스레 히틀러와 나치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어서 지난 2001년에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작품을 공연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일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13살때 드레스덴 극장에서 연주되었던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보고 자신도 지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는데, 이때 부터 바그너는 음악가에 뜻을 두고 나름대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물론 이때 작품은 습작이라는 것이 더 맞겠지만, 바그너는 꾸준히 작품을 쓰면서 음악가로서 조금씩 자신을 키웠다. 그가 음악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840년 《리엔지》(Rienzi) 이후다. 1842년 드레스덴으로 이사온 바그너는 1849년에 5월 봉기 사건 후 파리로 망명할때까지 살았으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The Flying Dutchman)과 《탄호이저》(Tannhauser) 두 작품을 썼다. 그러나 바그너는 드 레스덴 5월 봉기 사건 당시 사회주의자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과 그의 동료인 아우구스트 뢰켈(August Rockel)와 어울리고 봉기에 가담한 혐의로 드레스덴을 떠나 파리로 망명한다. 훗날 히틀러의 이미지와 겹치는 이미지와 달리 독일 자유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독일 영방 국가들에 퍼진 자유주의 운동은 독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이어진다.

아뭏튼 취리히로 망명한 바그너는 추방령이 풀리는 12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이 시기 바그너는 가정사에서도, 음악도 안풀리던 시기였다. 어려워도 바그너는 특유의 끈질긴 성격으로 《트리스탄 과 이졸데》, 《니 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를 작곡했다. 《니벨룽겐의 반지》는 4부작으로 이뤄진 서사시로서 게르만 족의 고대 신화를 기반한 악극이다.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3부 발퀴레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헬리콥터 강습부대가 베트콩 거점을 공격하는 장면에서 쓰이기도 했다. 아르투 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빠진 것은 이 시기였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바그너의 후기 오페라 작품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1861년에 바그너에 대한 추방령이 해제된 후 바그너는 1864년 바이에른 국왕 루트 비히 2세를 알게 된다. 루트비히 2세는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였으며 그에게 아낌없이 돈을 지원했다. 바그너는 거의 처음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작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에게 바그너의 빚을 청산해주고 뮌헨 시내에 고급 주택도 사주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와 관계는 불과 2년도 안되어 파국을 고했다. 바이에른 인들은 바그너를 순진한 국왕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같은 존재로 생각하여 추방 운동을 벌였다. 바이에른인들의 바그너 추방 운동은 바그너 자신이 불을 붙여주었다. 게다가 정신 상태가 약간 불안했던 루트비히 2세는 독점욕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바그너는 그 점을 깊이 고려하지 않고 (아마 몰랐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자신의 정부 코지마 폰 뷜로를 뮌헨으로 불렀다. 루트비히2세는 코지마가 자신과 "자신의 바그너" 사이를 방해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1865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 공연에 불참하여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암시했다. 하지만 바그너는 전혀 그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루트비히2세 주변 인물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이에른 수상 루트비히 폰 데르 포르텐(Karl Ludwig von der Pfordten)은 바그너를 물리치지않으면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루트비히2세를 들이박아버렸다. 결국 루트비히2세는 바그너에게 바이에른을 떠나라고 명령했고, 바그너는 1865년 12월에 뮌헨에 온지 20개월만에 코지마와 함께 취리로 갔다. 루체른 호수의 트립쉔(Triebschen) 의 빌라에 머물면서 바그너는 《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를 완성한다. 스위스로 이사한 바그너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알게 된다. 두 사람은 굳은 관계가 되었으나, 후년에 니체는 바그너와 결별하고 멀어졌으며, 바그너를 퇴폐하고 타락한 사람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바그너의 평화주의와 반유대주의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1871년,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에 정착했다. 바그너가 바이로이트를 자신의 오페라 《니벨룽엔의 반지》를 공연할 장소로 정했던 것이다. 그는 일반 극장이 아닌 특별히 《니벨룽엔의 반지》를 위해 새로운 극장을 세우기를 원했다. 공사비는 자신의 순회 공연과 각지에서 모금활동으로 충당했다. 그리고 그를 내쳤던 루트비히2세도 거액을 지원했다. 비록 내치긴 했어도 여전히 바그너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1876년 8월에 《니벨룽엔의 반지》를 초연했다. 이후 바이로이트는 바그너가 착안한 자신의 음악작품을 위한 축제를 여는 곳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은 바이로이트 극장 공연을 위해 작곡한 작품이다. 하지만 니체가 바그너가 결별한 것은 이 작품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는 성대하게 치러졌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2010년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는 7월 25일 로엔그린 공연으로 시작하여 8월 28일 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를 끝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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