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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월 30일] 1956년,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1/27 [20:14]

<오늘의 역사> [1월 30일] 1956년,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

김종현 | 입력 : 2010/01/27 [20:14]

1956 년 1월 30일, 김창룡 육군 중장(추서, 암살 당시에는 소장)이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21의 2 자혜병원 앞에서 출근하던 길에 괴한 2명으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김창룡은 총 5발을 맞고 즉사했으며, 운전병이 1발을 맞았다. 범인들은 곧장 지프차를 타고 현장에서 도망쳤다.

이승만의 오른팔로써 이승만 정권을 음지에서 뒷받침하며 참모총장을 능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김창룡은 그렇게 사라졌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백범 김구가 암살됐을 때는 열흘이 지나서야 마지 못해 문상을 왔지만, 김창룡이 암살되자 곧바로 달려왔고 "그는 나를 대신해 죽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공식 기록에는 1920년생으로 되어 있으나, 자신이 남긴 기록에는 1916년 7월 18일 생으로 되어 있다. 아마 당시 신생사 사망율이 높아서 부모가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김창룡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4년제 덕성사립보통학교와 2년제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을 졸업한 후 가다꾸라(片倉) 제사(製絲)회사에서 2년간 일했고, 퇴직 후 만철(滿鐵)소속 신경(新京, 현재의 장춘)역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여기서도 2년 동안 역원으로 지낸 후 1940년대초 관동군 소속 헌병 보조원이 되었다. 김창룡의 인생은 이때부터 바뀌었다.

1941년 김창룡은 정식으로 헌병 이등병이 되었다. 이등병이 된 김창룡은 소만 국경에서 중국 공산당을 추적하는 첩보 임무를 부여받았다. 1943년 김창룡은 중국 공산당 거물이었던 왕근례(王近禮)를 체포했고, 이어서 그를 이용하여 9개 조직 50여명을 체포한다. 이 공로로 김창룡은 헌병대 오장(지금 한국군에서는 병장 내지는 하사관 계급)으로 승진했다. 이후에도 계속 성과를 내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그의 인생도 끝나는 것같았다. 고향인 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일산리로 돌아왔으나 일본 관동군 헌병이라는 친일 경력때문에 숨어지내야 했다. 나중에 김창룡은 2번이나 소련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탈출했다고 주장했다. 달리 증거 자료가 아직 발견된 게 없어서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친일 경력도 친일 경력이지만 "빨갱이"를 때려잡았기 때문에 소련군이 가만히 놔두었을 가능성도 별로 없다고 보인다. 자기 자신의 말대로 2번의 체포때문인지 김창룡은 1946년에 월남하여 사병으로 국군(당시에는 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1947년에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3기로 입교하고 4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에는 군대를 급격히 확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사관학교 교육기관이 3개월에 불과했다.

임관 후 김창룡은 1보병연대에서 관동군 헌병대 첩보활동 경력을 인정받아 새로 창설된 첩보소대 소대장이 되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을때 사관학교를 촬영하던 소련군 대좌, 중좌, 그리고 운전수를 발견하고 추격했다. 소련군 숙소에서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때 미 24군단 CIC 정보원들이 도착하여 카메라와 필름을 압수했다. 그는 이때부터 날기 시작했다. 그뒤 1947년부터 김창룡이 암살된 1956년 1월까지 10여년 동안 일어났던 큰 사건에 많은 부분 김창룡이 개입되어 있었다.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로도 지목된 바 있었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끝까지 보살핀 것은 사실이지만, 암살의 직접 배후는 아닌것 같다는 것이 현재 중론이다.

아뭏튼 김창룡은 1948년 여순반란 사건 와중에서 전개된 숙군 과정에서 1연대 정보주임 장교면서 육군 본부에서 육군본부 정보국 3과장 김안일 소령과 함께 숙군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김창룡의 수사 방식은 과거 일본군 헌병대가 써먹은 방식, 즉 고문에 의존하는 방식이어서 많은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했다. 고문의 고통에 못이긴 연행자들이 친구들 이름을 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끌려온 피의자들은 영문도, 혐의도 모른 채 끌려와 또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고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한 번은 김창룡이 수백명을 한꺼번에 체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진술서가 모두 똑같았다. 사정을 알고 보니, 부대 회식 자리에서 지휘관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더니 한 이북 출신 병사가 아는 노래는 북한에 있을때 배운것 뿐이라며 그 노래를 불렀다가 그 노래를 들은 김창룡이 회식 자리의 병사들을 모조리 체포했던 것이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고 이들을 족쳐서 또 아무나 수백명을 잡아들인 것이다. 아는 노래가 없어서 북한에 있을때 배운 노래를 불렀다는 죄목으로 벌어진 일이다.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신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라거나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면서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백선엽 전 참모총장은 폐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1948년 중부전선 4연대 2개 대대 병력이 한꺼번에 월북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군내에 암약하고 있던 공산당원(남로당)을 제거하여 한국전쟁에서 군이 후방에서 와해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회고록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각주:1].

한국전쟁 발발 후에도 김창룡은 방첩활동을 계속 수행했고, 1950년 10월에는 특무부대를 창설했다. 이때 직함이 특무대장이다. 반이승만 세력 탄압에도 앞장서면서 이승만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김창룡이 관여한 사건 중에는 용공 조작 사건도 많았다. 그가 이룬 업적의 상당수가 김창룡이 조작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김창룡 암살범 재판 과정에서 처음 밝혀졌다. 게다가 김창룡은 공산당이나 반이승만 활동가들만 탄압한 것이 아니었다.

좌익 세력에 대한 반감(반이승만 세력 중에는 좌익 성향 세력도 많았다)은 그가 헌병대 오장이 되면서부터, 그리고 북한에서 (자신의 말대로라면) 2번의 체포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하지만, 개인 감정을 해소하는 도구로도 권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김창룡이 야간순찰 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꾸짖었던 일본군 하사관 출신 김도영이 그런 사례다. 김창룡은 김도영을 3번이나 적과 내통하거나 쿠데타를 모의했다며 체포하여 몇 달씩 구금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김도영은 무죄로 풀려났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을 몰락시키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갖가지 용공 조작 사건과 함정 수사를 벌여 원성을 샀던 김창룡이었지만, 군부 내에서는 김창룡에게 또 다른 불만도 있었다. 김창룡은 이승만의 신임을 바탕으로 공공연히 월권 행위를 하여 군 지휘 계통을 문란케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군부 내에 부정 부패가 만연해 있었고 김창룡은 특무대장으로써 깊숙이 수사하고 있었다.

저격 당시 김창룡은 문서 꾸러미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 문서는 군내 부패 사건 중 하나였던 원면 사건 수사 관련 문서였다. 원면 사건은 국방부가 정부에 요청하여 겨울용 군수물자로서 50만 달러에 해당하는 원면을 받고 그것을 시장에 팔아 10억환이상의 이익금을 선거자금으로 쓰도록 자유당 고위층에 바쳤다는 사건이었다. 이 사실을 자유당 비주류였던 하태환 의원이 폭로했는데, 김창룡은 이기붕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계속 파고 있었다. 이 사건이 김창룡의 암살을 불러온 원인이라는 것이다.

1956년 1월 30일, 김창룡에게 권총을 쏜 2명은 신초식과 송용고라는 사람이었다. 이들을 사주하고 암살 계획을 세운 사람은 육군 대령 허태영이었다. 신초식과 송용고는 특무부대에서 일하던 민간인이었으며, 허태영 대령도 특무대 출신으로 김창룡 휘하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달여 수사 끝에 2월 23일에 허태영 대령이 특무대에 체포되었고, 도피했던 신초식과 송용고, 그리고 현장에서 신초식과 송용고를 태우고 도망친 지프차 운전사 이유회가 체포됐다. 그 후 지프차를 제공했던 105범죄수사단 허병익 중위, 특무대 수사방향을 알려주고 피의자들을 숨겨줬던 육군 정병감 이진용 대령, 허태영의 집을 드나들었던 안정수 소령 등이 연행됐다. 또 사건 직후 허태영으로부터 지프차를 샀던 현직 민의원 도진희도 구속됐다. 허태영과 도진희 모두 김창룡의 부하였던 사람들이며, 도진희는 고문으로 피의자를 죽였다가 김창룡이 빼내준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왜 김창룡 암살 사건에 가담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허태영은 도진희를 지프차 처리를 위해 매수했을 뿐이라고 했으며, 도진희는 공모 사실을 끝까지 부인했기 때문이다.

1956년 8월 17일 공판에서 허태영, 이유희 사형, 안정수, 허병익, 이진용 등에 3년 ~ 20년형이 언도되었다. 그러자 11월에 허태영의 부인 황운하가 탄원서를 제출했다. 남편 허태영에게 암살을 사주한 배후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별조사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배후로 지목된 2군 사령관 강문봉(姜文奉) 중장, 전 헌병사령관 공국진(孔國鎭) 준장, 강흥모, 성정보, 백학규를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강문봉은 사건 배후설을 강력히 부인했으며, 허태영 대령은 김창룡이 상관과 동료를 모략하여 자기 영달을 꾀했고, 수많은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으며 고위 장성들의 비행을 조사하여 군을 이간시키고 단결을 저해했으며, 군 통수 계통을 문란케 하여 군 발전을 저해했기 때문에 암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7년 4월 17일 군법회의는 주동자로 지목된 강문봉 중장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강문봉 중장을 아꼈던 이승만은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공국진은 7년형을 확정받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3년형에 처해졌다.

김창룡은 현재 대전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그의 친일 경력과 업적 대부분이 김창룡이 조작한 점이라는 들어 김창룡을 대전 국립묘지에서 빼야 한다는 시민단체의 주장이 있지만, 2010년 현재에도 김창룡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김창룡과 암살 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http://theme.archives.go.kr/next/history/kimcy/viewMain.do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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