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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2월 10일], 1977년 박정희 대통령 행정수도 이전 구상 공개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2/10 [04:01]

<오늘의 역사> [2월 10일], 1977년 박정희 대통령 행정수도 이전 구상 공개

김종현 | 입력 : 2010/02/10 [04:01]

1977년 2월 10일, 서울시 연두순시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은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구상을 공개한다. 이때부터 청와대는 오원철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이 단장으로 있던 중화학공업기획단 산하에 행정수도 기획팀을 설치하여 2년간 연인원 391명을 투입하여 100권 분량 보고서로 실천 계획을 수립한다. 백지에서 시작한다고 하여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백지 계획"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추진한 행정수도 이전은 유야무야되었다.

1975년 8월 진해 여름별장에서 박정희가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지시한 이후 비밀리에 TF를 꾸린 지 4년 후인 1979년 10월 초 최종 보고서가 나왔다.노무현 대통령은 생전인 2007년에 2007년 7월 국가 균형발전 오찬 간담회에서 “저는 유신헌법 등 박정희 정권을 계속 반대해 왔던 사람인데 행정수도 건설은 박 전 대통령의 계획을 계승하는 것이어서 기분이 묘하다”고 했을 정도로 박정희 정권의 행정수도 이전 계획과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이전 계획은 비슷한 면이 많다.

박정희 정부의 임시행정수도 계획에 참여했고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장을 지낸 김안제 서울대 명예교수도 “40년 동안 수십 가지 처방을 내리고도 수도권 집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일종의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이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건설 정책”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박정희 정권이 행정수도 이전을 구상한 이유는 크게 3가지였다. 휴전선과 너무 가까워 북한군의 사거리내에 중앙정부와 3군 본부 등 육해공군 핵심 수뇌부가 모두 모여 있다는 점이 첫번째였고, 2번째로 발표 당시 인구 750만명에 이른 서울 및 수도권으로 지나치게 인구와 경제력이 집중하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고, 3번째 이유는 2번째 추진 이유로 제시한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2000년대까지 전국 국토의 균형 발전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1972년 유신헌법에 102조 2항에 "국토균형발전"을 국가의 기본 임무로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여겨진다.

박정희 정권이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한 이 3가지 이유는 현재도 유효하다. 특히 안보문제는 주한미군의 한국군으로 10대 이양 임무 중에 하나가 북한의 장사정 포병 세력에 대한 대처가 있다. 170mm, 240mm 등 장사정 화포류로 수도권을 타격할 경우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 주한미군이 10대 임무로 간주할 정도로 북한의 장사정 포병은 핵 문제에 가려 일반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핵미사일보다 실질 효과 면에서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기 체계이기 때문이다. 핵미사일보다는 포병의 장사정 포를 더 많이 쏠 수 있으니까. 게다가 포탄 탄두에는 생물학 또는 화학 탄두를 탑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피해는 가늠하기 힘들다. 또 북한의 남침 시나리오에 단기전을 전제한 시나리오가 있는 이유도 북한의 장기전 수행 능력도 이유겠지만, 서울에 너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시나리오인 것이다. 실전을 경험한 군인 출신 대통령으로서 자주 국방에도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로서는 이런 불안한 안보 상황을 해결해야할 과제로 여겼던 것이다. 전시 군령권을 쥔 3군본부가 대전 옆에 계룡시로 이전한 것도 아마 이 유산이 아니지 싶다.

그러나, 안보 문제보다 박정희 정권이 행정수도 이전(사실상 천도)을 추진한 더 큰 관심사는 서울 및 수도권 과밀화 현상 해결과 국토 균형발전이었다. 박정희가 1975년 여름에 김정렴 비서실장을 불러 비밀리에 행정수도 이전을 지시하면서 한 말은 수도권 과밀화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시 행정부처부터 지방으로 옮겨야 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행정부 뿐만 아니라 입법부 및 사법부, 그리고 군 지휘부도 모두 이전하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기간에 한꺼번에 이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10년에 걸쳐 천천히 이전하겠다는 것이 박정희 정권의 구상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에게 보고된 백지계획에 따르면 행정수도의 최종 입지는 충남 공주 장기지구였다. 노무현 정권이 추진했던 행정수도 이전 계획지인 연기군보다 북쪽이다. 이곳 8600㎗(8600만㎡)의 땅에 인구 10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행정수도를 불사조가 날개를 편 모양으로 건설한다는 것이 백지 계획의 기본 구상이다. 국가기관으로는 청와대를 비롯해 입법·사법·행정부를 모두 옮기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지 사실상 수도를 천도하는 것이었다. 흰말 엉덩이나 백마 궁둥이나 서로 다른 부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듯이 말이다. 동아일보는 2003년 1월 19일 자에 따르면, 공주시 장기면의 장군산 자락에 청와대를 두고, 남쪽으로 정부종합청사, 국회가 일렬로 늘어서는 배치였다고 보도했다. 또한, 중앙에는 정부청사와 상업지역을, 양쪽 날개부분에는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또 오른쪽 날개의 아래쪽에는 금강에 접한 수상 스포츠 시설까지 계획했다. 지도를 보면 장군산과 금강 사이 평야 지대에 새가 날개를 편 모양으로 도시를 건설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백지 계획은 수도만 새로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간조선 2085호(2009년 12월 15일)에 따르면, 오원철 전 제2경제수석은 공주군 장기지구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면서 가로림만 프로젝트를 동시에 추진했다. 오 전수석은 이렇게 얘기했다.

"행정수도 이전 시 이를 지탱해줄 대규모 공업기지가 배후에 필요했다. 그때는 수출 주도의 정책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러자면 국제 물류의 원활한 이동이 핵심 과제였다.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원료를 수입하고 여기서 만들어진 제품을 내다팔기 위해서는 커다란 항구가 필요했다. 행정수도 이전과 함께 ‘가로림(加露林)만 프로젝트’의 추진이 필요했던 배경이다."

-주간조선 2085호(2009년 12월 15일)

‘가로림 자유경제특구’ 구상도 10.26 사건 이후 묻혀졌다.

하지만 가로림만 개발 계획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행정수도 이전은 수도권 과밀화 문제를 해소하고 국토 균형발전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2000년대의 국토구상>이다. 이 구상은 행정수도를 중심으로 각 권역의 중핵 도시들과 산업기지를 연결하겠다는 것이었다. 전국에 거미줄 모양의 간선망을 계획하고, 이 간선망을 직선화한 고속도로를 통해 전 국토를 모두 잇겠다는 것이었다. 이 구상은 지금 현재 전국 각지에서 지방 도시들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로 현실화하고 있다.

1977년에 무려 40년 뒤를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처럼 1년, 2년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 계획을 추진할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40년을 내다보고 천천히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운하같은 건 계획에 들어있지 않다.

박정희의 마지막 프로젝트였던 행정수도 이전은 그가 죽으면서 모두 역사 속으로 묻혀버렸다. 그러나 박정희가 꿈꾸었던 안보 문제 해결과 수도권 과밀화 해소라는 문제 해결을 노무현 정권이 이어받아 추진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당시 조선일보가 열심히 쌍수를 들어 수도 이전을 촉구한 것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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