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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3월 21일] 1960년, 샤퍼빌 대학살 사건 발생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3/21 [00:26]

<오늘의 역사> [3월 21일] 1960년, 샤퍼빌 대학살 사건 발생

김종현 | 입력 : 2010/03/21 [00:26]

1960년 3월 2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샤퍼빌(Sharpeville)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경찰이 백인 정권의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던 흑인 시위대에 발포하여 공식 발표로는 69명을 죽이고, 180명 이상이 부상한 사건이다. 사망자 중에는 어린이 1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은 흔히 아파르헤이트라고 불린다. 아파르헤이트는 흑인은 열등한 민족이라는 악의로 가득찬 편견에 입각한 정책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은 사회에서 개인이 저지르는 차원이 아니라 법률로 확립한 국가 정책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이 차별 대상으로 규정한 인종은 흑인만이 아니었고, 아시아인,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컬러드(Coloured)였다. 물론 이중에서 최하에 속한 인종은 아프리카 흑인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시아인도 인종 차별 대상으로 삼아 탄압한 백인 정권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점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제정한 인종 차별 관련 법률 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면, 1949년 나치의 뉘른베르크법을 연상할 수 밖에 없는 인종간 결혼금지법(Prohibition of Mixed Marriages Act), 인종에 따라 거주 지역을 규정한 법률인 집단지역법(Group Areas Act, 1950년), 반투자치법(Bantu Authorities, 1951년), 백인과 흑인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임금 격차를 두도록 규정한 광산노동법(1956년), 미국에서 로자 파크스가 1955년 12월 1일에 겪었던 것처럼 공공 시설에서 흑백 분리를 규정하는 시설분리보존법(Reservation of Separate Amenities Act, 1953년) 등이 있다.

반공법 같은 경우에는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처럼 백인 정권이 공산당이라고 임의로 규정한 단체나 사람은 모두 체포할 수 있는 법률이었다. 백인 정권은 이 법률을 악용하고 남발하여 아무 흑인들에게나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어 살해하곤 했다. 한국의 역대 독재 정권들이 즐겨 사용한 수법이다. 반투 자치법은 마치 흑인들의 권리를 향상시키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박탈하려고 획책한 법률이었다. 게다가 흑인들에게 주어진 영토는 반투스탄(Bantustan)이라는 땅은 불모지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 정권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을 격리하고 분리시키되, 백인들을 위한 최소한 노동력을 흑인이 제공하도록 한다는 정책을 실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한 것이다. 이런 정책의 결과 1970년대에 이르러 다수인 1,800만 흑인들이 불과 13% 규모의 불모지로 쫓겨나야 했으며, 소수 백인 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 주도권을 유지했다. 흑인을 제외한 나머지 20% 중에도 인종 차별 대상인 아시아인과 혼혈인이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이런 법률들 중에 1960년 3월 21일 샤퍼빌 학살을 불러온 법률은 통행법(Pass Laws , 1952년)이었다. 이 법은 역사도 오래되어 1797년 6월 27일에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에서 처음 제정했다. 아프리카 원주민(흑인)들을 케이프 식민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샤퍼빌 학살 당시 적용된 통행법은 1952년에 새로 제정된 것으로, 16세 이상 흑인은 모두 통행증을 항상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샤퍼빌 학살이 있는 지 4년 후 통계지만, 1964년 백인 경찰에 체포된 약 220만 명의 흑인 중 1/3은 통행증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전과자가 되었다.

아프리카 민족 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는 통행법 반대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ANC는 3월 31일부터 반대 운동을 시작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으나, 1959년 ANC에서 떨어져나와 독립한 범아프리카회의(Pan Africanist Congress of Azania, PAC)가 3월 21일에 시위를 일으켰다.

3월 21일, 흑인 12,000여명이 샤퍼빌 경찰서로 모였다. 시위대는 통행증을 소지하지 않았다. 잡아갈테면 잡아가라는 뜻이었다. 오전 10시, 대규모 시위대는 경찰서 앞에서 평화롭게 축제를 벌였다. 고작 20명도 채되지 않은 샤퍼빌 경찰서의 백인 경찰관들은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경찰과 군은 그날 다른 마을인 에버튼(Evaton)에서 써먹은 수법을 샤퍼빌에서도 사용했다. 사라센 장갑차를 배치했다. 오후 1시 15분, 사라센 장갑차는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군중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을때 백인 경찰은 영국을 나치로부터 구출했던 스텐 기관단총을 등 뒤에서 난사했다. 사상자 대부분은 등에 총을 맞았다. 군중들이 무장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경찰은 나중에 군중들이 돌을 던졌고 그래서 응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샤퍼빌 경찰 지휘관 Pienaar 중령은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며 부인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증언했다.

    the native mentality does not allow them to gather for a peaceful demonstration. For them to gather means violence.
    원주민(흑인)에게 평화 시위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모인다는 것은 폭동을 의미한다

사건 발생 후 다음 주부터 흑인들은 저항 운동에 나섰다. 시위, 항의 행진, 파업, 봉기가 연이어 발생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정권은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했으며 18,000명 이상을 체포했다. ANC와 PNC는 무장 투쟁으로 방법을 전환했다.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샤퍼빌 대학살 사건은 큰 쟁점이 되어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규탄하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34호를 통과시켰고, 영연방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영연방에서 축출했다. 이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경제 제제 및 금수 조치가 이어졌으며,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대통령이 인종차별 정책 폐지를 선언한 이후에야 경제 제제 조치는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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