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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4월 19일], 1943년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들이 봉기하다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4/19 [00:00]

<오늘의 역사> [4월 19일], 1943년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들이 봉기하다

김종현 | 입력 : 2010/04/19 [00:00]
▲사진제공=위키피디어

1943년 4월 19일, 독일 SS와 경찰대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을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해 게토로 들어섰다. 그러나 SS와 경찰들을 기다렸던 것은 차라리 싸우고 죽자며 유대인들이 던진 화염병이었다. 5월 16일까지 한달동안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은 외부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빈약한 무장으로 독일 SS와 용감하게 싸웠고, 그리고 죽어갔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홀로코스트 중 유대인이 벌인 가장 큰 규모의 저항 투쟁이었다.

1940년, 나치는 폴란드에 Ghetto라 불리는 유대인 집단 거주 지구를 세우기 시작했다. 1940년 당시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대략 300만을 헤아렸고, 나치는 이들을 몇 개의 게토로 분산하여 집단 수용했다. 그 중 가장 큰 규모가 바르샤바 게토다. 바르샤바 게토는 바르샤바 중심부에 위치하여 30만 ~ 40만 가량의 유대인을 수용했다. 게토 내부 상황은 매우 열악했으며, 독일은 높은 외벽을 쌓아 게토를 완전히 섬으로 만들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원제:The Pianist)에 바르샤바 게토의 참상이 일부 묘사되어 있다.

1942년 7월 23일부터 9월 21일까지 바르샤바 SS(Schutzstaffel)는 헤르만 회플레(Hermann Höfle) SS소령(SS-Sturmbannführer)의 지휘로 Großaktion Warschau라는 작전 명으로 게토의 유대인들을 절멸수용소로 이송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은 Aktion Reinhard(또는 Einsatz Reinhard)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전체에서 벌어진 "이송 작전"의 일부였다. 유대인들에게는 "동부 지역 재정착"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전으로 나치는 254,000명에서 300,000명 사이로 추정되는 유대인을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이송했고, 이들 대부분은 가스실에서 사라졌다.

1943녀 1월 18일, SS가 2번째로 유대인을 이송하려 할때 첫번째 봉기를 일으켰다. 게토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이 얘기하던 "재정착"의 실체를 알았고, 싸우다 죽자고 결의한 때문이다. 유대인 투쟁 조직(Jewish Combat Organization, 폴란드어로 Żydowska Organizacja Bojowa, ŻOB)와 유대군사연합(Żydowski Związek Wojskowy, ŻZW, 영어로는 Jewish Military Union) 주도한 이 싸움으로 SS는 계획했던 숫자에 미달하는 유대인만 이송하고 중지해야 했다. 그리고 3개월 뒤인 1943년 4월, 마지막까지 남은 유대인을 "동부 지역에 재정착"시키기 위해 SS와 경찰이 다시 바르샤바 게토로 들어왔던 것이다. 가운데 4월 17일, 하인리히 힘러는 위르겐 슈트로프(Jürgen Stroop)를 바르샤바로 보내, 페르디난트 폰 자메른-프랑켄에그(Ferdinand von Sammern-Frankenegg)를 대신하여 이송 작전을 지휘하게 했다. 1월 사건에 대한 문책성 인사였다. 도착하자 마자 슈트로프는 즉시 이송 작전을 재개했다. 그 날 유대인들이 다시 봉기한 것이다.

4월 19일 시점에서 봉기에 가담한 유대인은 400명에서 1,000명까지 분명하지 않다. 무장은 자동권총과 리볼버가 주력이었고, 소총 및 자동화기는 극히 소수였다. 그 외에 그들이 만들 수 있는 무기는 화염병이 고작이었다. 외부에서 폴란드 레지스탕스들이 무기를 지원해줬지만, 폴란드 레지스탕스들도 형편이 조금 나은 정도여서 많은 물자를 지원해줄 수가 없었다.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영어로 Home Army)과 공산계 인민근위대(Gwardia Ludowa,People's Guard)가 지원해줄 수 있는 무기는 중기관총 2정, 경기관총 4정, 기관단총 21정, 소총 30정, 자동권총 50정, 그리고 수류탄 400여발이 전부였다. 부족한 무기는 외부에서 보급이 안되는 탓에 독일군에게서 노획하거나 직접 만들어 쓰기도 했다.

독일 측은 일평균 2,100여명을 투입하여 유대인 봉기군을 진압했다. 병력 구성은 다양했는데, 폴란드인 경찰대(Blue Police), 5개 SS예비대대 및 훈련대대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바르샤바 지구 게슈타포, 질서경찰(Ordnungspolizei), SS보안방첩부(Sicherheitsdienst, SD), 국방군 철도 공병대, 대공포부대, 우크라이나인 대대, 라트비아 보조경찰대(Latvian auxiliary police) 등을 동원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는 정규군과 무장친위대가 주력이었지만, 1943년 게토 봉기에서는 SS와 각종 경찰부대가 주력이었다. SS는 무기도 부족한 유대인들에 독가스와 최루가스까지 퍼부었다.

봉기 중 가장 오랜동안 독일군 공격에 버틴 곳은 Muranowski Square에 있던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4월 19일 봉기 첫날부터 4월 말까지 끈질기게 독일군과 전투를 버렸다. 봉기군은 이 건물 옥상에 2개의 깃발을 내걸었는데, 하나는 폴란드 국기였으며, 다른 하나는 푸른색과 흰색 천으로 만든 ŻZW를 상징하는 배너였다. 이 깃발들은 바르샤바 시내에서 잘 보였다고 한다. 진압군은 이 깃발들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힘러가 직접 반드시 이 2개의 깃발을 철거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독일군은 몇 번이나 깃발을 끌어내리고자 시도했지만, 건물을 완전히 장악할때까지는 모두 실패했다. 그들은 깃발들이 다른 유대인들과 폴란드인들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다. 오늘날 이 2가지 색은 이스라엘의 국기에 사용되고 있다.

봉기군은 열심히 싸웠지만, 애초부터 이길 수는 없는 싸움이었다. 4월 29일, ŻZW 지도부가 완전히 괴멸했고 일부는 바르샤바를 탈출했다. 5월 8일, SS는 ŻOB의 주 지휘소를 발견하여 독가스를 동원하여 집중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ŻOB의 지휘부가 전멸해버렸다. 현재 ŻOB의 벙커가 있던 Miła 18에는 추모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후 유대 봉기군의 저항은 급격히 소멸했다. 봉기의 공식 종료일은 5월 16일이다. 하지만, 게토 곳곳에서 그해 여름까지 독일군을 저격하는 마지막 남은 전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봉기 진압 후 게토는 파괴되고, 게토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결국 곳곳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갔다. 끌려간 유대인은 50,000여명이다. 봉기 중 독일군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총살당한 유대인은 13,000여명에 달했다. 탈출에 성공한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빈약하지만 나름대로 지원해준 폴란드 국내군에 가담하여 계속 독일군과 싸웠다. 독일군측은 슈트로프가 제출한 공식 보고서에서 17명 전사, 93명 부상이라고 했지만, 일부에서는 선전 목적으로 피해 상황을 축소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슈트로프의 보고서를 반박할 증거 자료는 아직 없으며 유대측에서는 독일군 사상자를 300여명으로 추산했다.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적어도 이스라엘은 그들을 잊지 않았다. 봉기 후 체포된 유대인들 중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Ghetto Fighters라 불리며, 그들끼리 모여 Lohamey ha-Geta'ot 키부츠를 건설했다. 이 키부츠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 "게토 전사들의 키부츠"란 뜻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게토 봉기군의 저항을 상징했던 ŻZW는 이스라엘의 국기 색깔로 사용 중이며, 봉기 현장은 과거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럿 기념비가 남아 있다. 그리고 유대인을 지원하고, 봉기 후에는 탈출한 유대인들을 숨겨줬던 폴란드인들은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켰다. 1970년 전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Bily Brandt)는 폴란드 방문 중에 봉기 기념비를 참배하며 무릎을 꿇어 독일의 과거사에 대해 행동으로 사죄했다. [각주:3]이웃나라 일본과 이 얼마나 대조되는 모습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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